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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방랑시인 김삿갓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06-10-23 10: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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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고 김삿갓(김병연) 유적지  

김삿갓유적지는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과 소백산의 양백지간으로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인 선달산에서 발원하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김삿갓유적지로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흐르고 가을철에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드는 경치좋은 곳이다.
  
와석리의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와인리와 거석리를 병합하여 그 첫차를 따서 와석리라 명명하여 불리어 오고 있으며, 노루목의 자연 부락명칭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의 경계지점의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이곳의 노루목에는 천재 방랑시인 난고 김병연 선생의 묘소와 주거지가 위치하고 있다. 선생은 원래 전남 화순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선생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바로 이곳 골짜기에 묻어주었다.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씨의 노력으로 그의 묘소가 비로소 확인되었다. 그 이후 김병연 선생의 문학정신과 예술혼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1998년부터 매년 10월초에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열리고 있으며, 묘역 주변에는 108개의 장승과 33개의 솟대를 설치하였다.

김삿갓의 대표시를 선정하여 자연석을 이용한 시비 거리를 조성(시비 12개소) 하고, 이외 방랑시인 김삿갓노래비 건립과 목조각 조형물 설치 등 김삿갓유적지를 관광자원화하였다. 한편, 계곡 주변에는 조선민화박물관,  2001년 하반기 개관 예정인 묵산미술관과 토종박물관 건립 예정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 공간이 들어서고 있다.
등산객의 편의를 위하여 개설한 마대산(해발 1,052m) 등산로는 김삿갓묘역, 주거유적지 등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며, 계곡의 맑은 물과 아기자기한 폭포수, 가을단풍은 장관을 이룬다.

조선민화박물관을 출발하여 유적지로 연결되는 곰봉(해발 930.3m)등산로는 암릉구간의 바위가 곰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곰봉이라 일컫으며, 정상에서 멀리 보이는 백두대간은 한마리 용이 되어 꿈틀거리는 형상을 맛 볼 수 있는 등 김삿갓계곡의 좌우에 위치한 등산로는 외지 산악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김병연(金炳淵)이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된 내력  
조선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에 홍경래(1780-1812)는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 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날은 춥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 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炳夏)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炳湖)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에 김성수(金聖秀)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滅族)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첨부파일 kimsa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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